Recent Posts
Recent Comments
Link
«   2024/05   »
1 2 3 4
5 6 7 8 9 10 11
12 13 14 15 16 17 18
19 20 21 22 23 24 25
26 27 28 29 30 31
Archives
Today
Total
관리 메뉴

내가 그곳에

모순의 출발점, 고향 본문

글/수필

모순의 출발점, 고향

Athal 2016. 11. 22. 21:11

960830-10xxxxx인 내 주민등록번호를 보면 나는 서울 시민이었다. 등록지역을 나타내는 주민번호 뒷자리 두 번째 숫자 0은 우리나라 수도인 서울의 번호이다. 그렇지만 난 서울에 대한기억이 전혀 없다. 목사 안수를 받기 전이었던, 내가 태어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19978월 중순 서울의 한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시던 아버지는 경주의 한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셨다. 그렇게 내가 태어난 고향과 작별했다. 추억도 장소도 사람도, 무엇도 기억에 남지 않은 곳이 내가 태어난 고향이다.

그 후로도 경주에서 3, 전남 신안군 지도와 증도에서 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전북 순창으로 이사를 갔다. 순창에서 또 인천으로 인천에서 제천, 음성으로 이사를 했고, 청주의 한 고등학교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한 것까지 포함을 하면 9, 통학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고 실질적인 생활권인 충주까지 한다면 지금까지 총 열 지역에 살아보았다. 그래서인지 내게 있어 고향이란 개념은 이해하기 참 어려운 개념이다.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감정적이나 정서적 이해가 좀 힘들다. 태어난 곳과 가장 오래 산 곳, 아련한 추억이 있는 지역이 다 달라서인지 고향은 내게 남들과는 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.

그래도 가장 고향처럼 생각되고 아련한 장소를 뽑으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전북 순창을 선택할 것이다. 굳이 이유를 찾자면 떠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지 것 연락하는 친구들이 남아있고, 엄마 아빠와 가진 추억의 향이 진하게 베인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. 하지만 내가 이 장소에 갖는 고향이라는 느낌과 일반적인 고향이 갖는 정서가 같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. 그렇지만 돌아가고 싶은 장소는 아니다.

이 리포트를 위해 사진을 찾다 보니 참 그리운 장소들, 사람들을 오랜만에 봤다. 사진을 공부하다 본 글귀 중에 사진은 시간을 베어 한 장의 추억을 기록한다.”라는 것이 있었다. 말 그대로 사진은 베어낸 그 순간을 보여주면서 추억을 느끼게 해주었다. 추억에 잠겨 리포트에 쓸 사진을 고르는데 고민이 많아졌다. 그리운 사람과 찍은 사진도 있었고,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분과 찍은 사진도 있어서 어떤 사진으로 무슨 이야기를 써야할까 머리가 복잡해졌다. 사진을 넘기던 중 이 사진을 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과 아련함이 가장 강하게 느껴져 이 사진을 선택했다. 내가 기억하는 나의 가장 어린 시절이자, 추억하지만 돌아가고는 싶진 않은 모순적인 정서적 고향에 대해 내가 갖는 감정을 가장 잘 대변 해준 사진이다.

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이동리 10. 아직까지 잊지 못한 그 때 살던 집 주소이자 사진의 배경이 되는 장소다. 산골짜기 속 골짜기라 인터넷이 들어오는 것도 한참 늦고 집 앞엔 섬진강 지류가 흐르고 여름엔 반딧불이도 볼 수 있는 그런 시골 동네였다. 가장 가까운 이웃사촌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친구네 엄마가 소장님으로 계신 보건진료소와 친구네 매운탕집이 다였다. 다른 마을 가려면 차로 5분은 이동했어야 할 정도로 골짜기에 있던 교회였다. 그나마 정말 다행이었던 그 작고 깊은 장소에 동갑내기 친구가 둘이나 있었다.

리포트를 쓰는 지금도 이 곳에 대해 생각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그리운 장소다. 이사를 여러 번 다닌 덕에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 까지 다닌 학교만 6곳이다. 그래서 오래된 친구들 몇 없다. 학교에서 같은 반으로 지나쳐간 이들은 많았지만,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는 몇 없다.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몇 중 하나가 이때 사귄 친구다. 알고 지낸지 15, 내가 기억하는 내 첫 친구, 그 친구와 놀러가려고 나갈 때 교회 마당에서 찍은 사진이다. 이 사진을 찾고 혹시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이 없나 찾아보니 아쉽게도 사진을 잃어버린 건지 둘이 찍은 적이 없는 건지 사진을 찾지를 못했다. 찾았어도 지금 대구에서 막 상병을 달 참인 군인이라 다시 찍긴 힘들었을 테지만 말이다.

자전거에서 보조바퀴를 때고 처음으로 동네 친구 둘과 자전거를 타고 놀기로 하고, 애들을 만나러 수련원으로 쓰고 있는 폐교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아빠가 보조바퀴 땐 기념이라며 사진을 찍어 준 것이 리포트 주제로 선택한 사진이다. 이 작은 동네에 내 또래는 두 살 터울인 내 동생과 보건소의 우리 남매와 동갑인 두 형제 그리고 매운탕 집 막내, 이렇게 다섯 명이 전부 이었다. 그래서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 하원 후나 주말엔 몰려다니면서 노는 게 일이었다. 섬진강 지류를 끼고 3집이 다 있었고, 폐교에 있는 수련원 시설은 우리에게 정말 좋은 놀이터 이었다.

이 사진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 중 하나가 지금 다시 느끼기 힘든 친구들과 놀러 나갈 때의 고양감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이다. 여러 차례 전학을 다니면서 나름의 생존 방법이었던 것인지 깊게 다가가질 못했다. 그래서 이때처럼 편한 친구도 깊은 친구도 중학교 때 까진 사귀기가 힘들었다. 고등학교 때 사귄 친구들 오랜만에 만날 때도 이 때의 들뜬 기분과 즐거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. 아무런 계산 없이 보고 싶으니까 만나서 놀고, 놀다가 엄마가 집 오라고 하면 집에 가는 그런 시골 마을이었다. 친구를 만날 때 금전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,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기 때문일까?

21살 만으로 20살인 이 나이가 절대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, 또래에 비해서 이래저래 생각 할 기회는 많았었다. 전학가면서 생기는 그 공백, 낯선 장소에서 익숙해져가는 그 공백, 부모님이 새 사역지에 자리를 잡을 동안의 그 공백, 어린 날의 그 공백은 책과 어른 흉내 내는 사색으로 채워졌다. 작년 한 해 재수를 하면서는 진지하게 고민을 하면서 다시 그리워진 때가 바로 저 때였다. 아무런 고민 없이 꿈을 꾸고, 꿈을 입으로 뱉을 때 응원 받던 그 때가 너무도 그리웠다. 결국 내가 가려고 하는 길이 저 때 꾸었던 꿈을 기반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, 과고희망에서 외고 진학으로 꼬이고, 재수로 한 번 더 꼬인 나를 보면서 엔지니어/과학자의 꿈을 꾸기 시작한 저 때가 너무도 그리웠다. 아무 고민 없이 꿈꾸고, 아직도 거리가 멀어 자주는 못 보지만 가끔 만나는 그 친구들과 함께했던 그 때가 더 그립게 만든 사진이었다.

자전거를 타던 7살의 나는 엄마에게 물로 가는 자동차를 만들어 엄마에게 처음으로 타게 해주겠다던 공수표를 남발하던 아무 걱정 없던 꼬맹이였다.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, 꾸는 꿈이 당연히 이루어지는 줄 믿었었다. 프라모델을 좋아했었고, 고등학교 때 전기를 전공하신 아빠 덕에 전기도 어린 나이부터 익숙해져 있었다. 반딧불이가 살만큼 환경만큼은 좋았던 동네였기에 곤충도감에 나온 곤충들을 실제로 관찰 할 수 있었다. 이 좋은 환경은 내게 둘도 없는 과학 선생님이 되어 주었다. 만드는 걸 좋아했고, 호기심이 많았던 7살의 나는 저 두 발 자전거를 넘어지지 않을 때까지 연습했다. 그 어린 날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초이자 가장 많이 다치고 깨진 도전이었다. 자전거를 타기 위한 도전은 즐거웠다. 누군가의 요구도 아니었고, 내가 놀고 싶었고, 친구들과 같이 타고 돌아다니고 싶어서 한 도전이었다. 이 자전거는 탈 것의 즐거움을 알려주었다. 이 즐거움은 이 때도 가졌고, 지금도 가지고 있는 내 꿈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. 도전에서 넘어질 때 일어서는 법과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꿈의 거름을 만들어 주었다.

이 사진 덕분에 내가 가지고 있던 고향에 대한 모순적 감정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. 가장 자유로웠고, 글을 쓰는 지금도 수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치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이 모순적인 고향 순창군 동계면 이동리에 대해서 말이다. 내가 이해한 일반적 고향은 돌아갔을 때 누군가 남아있고, 언제든 돌아갈 수 있고, 거기서 누군가 날 기억해 주는 장소이다. 하지만 내 정서적 고향은 내 추억과 감정만 남아있을 뿐 이제 거긴 누구도 남아있지 않다. 친구들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, 수련원으로 쓰던 폐교도 모습을 바꿨고, 교회조차 모습을 바꾸었다. 그래서 나는 이 고향이 무척이나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. 정확히는 아무도 남지 않은 그 곳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. 가장 순수하게 도전했었고,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곳으로 기억하고 싶다.

그 때 아빠가 사준 자전거는 현재 아빠가 타다 물려주신 중고차로 바뀌어 있고, 과학자의 꿈은 전기 자동차와 인공지능 엔지니어라는 꿈으로 구체화 되어 도전 중에 있다. 이 도전은 자전거를 타기 위한 도전보다 분명 힘들 것이다. 10년 가까이 이 꿈 때문에 방황했지만 결국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것은 저 자전거를 타던 7살의 시골 꼬마다.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자전거를 타기 위해 일어나 페달을 구르던 그 꼬마다. 이제는 혼자 두발 자전거를 보조바퀴 없이 탈 수 있음에 묘한 고양감을 가지고 놀러가던 꼬마다.

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그리운 고향은 지금의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든 장소이다.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꼬마다. 어릴 때 꾸는 꿈에선 가능성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. 하고 싶고, 꾸고 싶으니 꾸는 꿈이었다. 7살의 시골꼬마가 꾸던 꿈을 21살의 대학생인 내가 이어 꾸고 있다. 이 꿈의 출발은 저 때 배운 자전거고, 나를 키운 그 시골의 환경이었다. 내 고향은 내게 꿈을 준 장소이다. 꿈 꾸는 원동력을 제공했고, 키워주었다. 내게 이 모순적인 고향은 출발선이다. 꿈의 출발선, 추억의 출발선, 친구의 출발선이다. 이 출발선에 남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, 아무도 없다. 그래서 난 이 출발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. 출발선은 출발선으로, 또 내 꿈의 원동력으로 남겨두고 싶다. 그래서 난 이 사진이 좋다. 내가 살았던 곳과 꿈의 출발점을 같이 보여주기 때문이다. 출발점인 자전거와 환경, 가장 좋아했던 자동차와 함께 찍은 이 사진을 말이다


Comments